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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15 제트 전투기

국방(Defence)

by 토담길 2013. 3. 2.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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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 '미그-15 제트 전투기'

 

 

- '1947년까지 미공군은 단지 미육군에 예속된 일개 비행 사단이었다'

 

           [사진출처 : warbirddepot.com]

 

 

 

"미그-15" 제트 전투기

 

미코얀구레비치 "미그-15"(MiG-15 ,러시아어: Микоян и Гуревич МиГ-15)는 구 소련(러시아)의 제트 전투기입니다. 흔히 "미그-15"라고 줄여 부릅니다. '미그-15'는 후퇴익을 도입한 최초의 제트기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 전쟁 초기에 미국 공군의 "F-86 세이버"와 함께 김일성의 공산군과 공중전을 치루며 우리나라를 구해줬던 대한민국의 혈맹국인 미국과 미군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적들의 전투기입니다. 그 이유는 아군기보다 사거리가 긴 기총을 "미그-15기" 기체에 장착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진출처 : warbirddepot.com]

 

아래에서도 연합기사를 인용했지만,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한국전쟁 당시 격추되거나 추락한 공군기는 미국이 "B-29  폭격기" 50여대를 포함된 총 1천100여대로 소련 공군기의 335대에 비해 3배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미그-15(MIG-15) 전투기"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최첨단 전투기였습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미코얀구레비치 "미그-17(MiG-17)"이 투입될 때 까지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의 주력 전투기였다고 합니다. "미그-15 전투기"는 소련에서 12,000 대 이상이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나라의 라이선스 생산까지 합하면 총 생산댓수는 18,000대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하는군요.

 

 

           [사진출처 : warbirddepot.com]

 

 

"미그-15" 개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은 아음속으로 비행할 수 있는 제트 전투기를 꿈꾸었는데, 이전까지의 직선익 전투기 보다 후퇴익 디자인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의 후퇴익 전투기 개발에 착수했고, 소련 군용 항공기 설계국의 수석 개발자였던 아르템 미코얀과 미하일 구레비치는 독일의 포케불프 Ta-183(독일어: Focke-Wulf Ta-183)를 참조하여 새로운 제트 전투기의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Ta-183에 적용된 많은 기술들이 "미그-15"에 적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Ta-183을 개발하던 대부분의 독일 기술자들은 서방 측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미그-15의 실제 설계는 독자적인 개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미그-15는 구조면에서 볼 때 Ta-183과는 전혀 다른 비행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commons.wikipedia.org]

 

 

소련, 독일산 제트기 엔진 입수

 

1946년 소련의 개발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상태로 보전된 독일의 하인켈 HeS 011(독일어: Heinkel HeS 011) 제트 엔진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미코얀은 새로운 제트 전투기의 엔진으로 이를 채용하였다고 합니다."미그-15"는 1947년 원형이 제작되었고 그해 12월 30일 첫 비행이 이루어졌다. 이후 양산에 들어가 실전 배치된 미그-15는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 진영의 주력 전투기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davidpride.com]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했을 때 "미그-15"가 한국에 나타나기 시작랬습니다. 미그-15기는 미국의 F-80, F-84 썬더젯 전투기 같은 미국의 전투기 보다 우수한 성능의 전투기임이 입증되었고, 중공군에게 일시적으로 공중전에서의 우위를 내주게 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전투기가 주간 폭격하는 것을 중지시키게 됩니다.

 

 

 

 

"미그 골목"이라고 불리웠던 압록강변으로 출격하기 위해 김포비행장에서 이륙을 준비중인 미공군의 "F-86A 세이버 전투기들[사진출처 : rt66.com]

 

 

 

 

 

1952년~1953년 호주공군의 77 1/F 비행중대에 편입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브라질의 클라그 (Clark)씨가 찍은 귀순한 미그 15기 모습[bob-west.com]


 

 

 

 

 

소련의 조종사에 의해 촬영된 "미그-15 전투기"에 탑승하려는 승무원들의 단둥 비행장 모습. 1950년 후반부터 1953년까지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사진출처 : rt66.com]

 

 

'1,106 대 335'

한국전쟁 당시 격추되거나 추락한 공군기는 미국이 1천106대로 소련 공군기의 335대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 당시 미 공군이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도 컸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은 중국 인민일보사에서 발행하는 환구시보(環球時報) 지난 1일자 기사를 통해 소개됐다.  신문은 최근 러시아에서 발간된 한국전쟁 참전 구(舊)소련군 조종사의 회고록 '사람들이 모르는 전쟁(중국명 不爲人知的戰爭)'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신문이 소개한 책 내용에 따르면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11월8일.

이날 소련 공군의 미그-15 전투기는 지금의 단둥(丹東)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미 공군 F-51기를 격추해 첫 전과를 올렸다. 또 이틀 뒤인 10일 신의주 상공에서 '하늘의 보루'라고 불리는 B-29 폭격기 1대를 격추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소련 공군은 미국과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일 발발할 것을 우려해 자국 조종사들을 중국인민지원군 군복을 입혀 위장을 시키고 조종사들간 교신도 중국어와 조선어(한국어)로만 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렸다. 또 작전 범위도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제한했다.

1951년 4월12일은 미소 양국의 공군사에 희비가 엇갈린 하루로 기록됐다.

 

미군은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철교와 주변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72대에 달하는 B-29 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맡은 F-80 전투기 32대를 한반도의 북쪽으로 출격시켰다.

소련 공군도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약 40분에 걸쳐 치러진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은 단 한대의 손실도 없이 B-29 폭격기 16대와 F-80 전투기 10여대를 격추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으며, 미 공군사에 이날은 '검은 목요일'로 기록됐다.

 

이처럼 소련 공군이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의 전투기로 불렸던 미그-15 제트 전투기와 철갑도 뚫는다는 37㎜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미그-15기는 자유자재로 수직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면서 둔중한 B-29기의 측면과 후면에 접근해 기습하는 방법으로 한국전쟁 기간 총 651대에 달하는 B-29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극동 주둔 미 공군은 전략 폭격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들 두고 신문은 "이 때문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 중국, 조선(북한) 등 3국에 원폭을 투하하겠다는 구상을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선양=연합뉴스)

 

 

 

 

           [사진출처 : cybermodeler.com]

 

 

 

"미그-15기", 한국전쟁 참전

"미그-15"가 실전에 배치된 첫 전쟁은 한국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당시 조선인민군 공군은 소련이 제공한 구형 전투기인 "야크-9형 전투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6.25 전쟁 개전 초기 소련은 한국전쟁에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50년 9월 16일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미국 공군에게 제공권을 제압당하고 북조선의 산업 시설 전반이 B-29의 폭격에 파괴되자 소련 공군을 투입하게 됩니다. 이에, 1950년 9월 21일 조선인민군의 소련측 군사 고문이었던 바실레프스키는 스탈린에게 평양의 방위를 위해 보로시로프 지구의 제 147사단 84전투기연대 소속 야크-9형 전투기 40기를 요청합니다.

 

 

      [사진 출처 :  trufault 님의 유튜브 동영상 캡처]

 

 

소련 측은 자신들의 공군기가 참전할 경우 미군이 이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을 우려 했으나 인천 상륙 작전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26일 이후 전세가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명확해진 상황에서 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암호통신문을 통해 소련의 군사 개입을 요청합니다.

 

 

스탈린은 바실레프스키를 통해 김일성에게 만주 지역에 전술 비행 학교를 설립하고 조종사의 훈련과 미그-15의 제공을 약속하였고, 이로써 북한의 조선인민군 공군은 1952년부터 미그-15로 무장하게 됩니다.

 

 

한편 소련 공군의 미그-15가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종종 미국 공군과 교전하였다. 미국 공군은 이 지역을 "미그 골목"(영어: MiG Alley)이라 불렀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 전쟁 초기에,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공산군은 강력한 항공 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UN군의 B-29는 자유롭게 폭격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에 미그 15가 등장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대일전에서 무적을 자랑하고 있던 B-29도 미그 15의 강력한 37 mm 기관포에 의해서 차례로 손해가 속출해,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까지조차 폭격기를 호위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프로펠러 폭격기가 제트 전투기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이것에 놀란 미국공군은 급히 후퇴익을 가지는 당시 최신예의 F-86 세이버를 투입해 제공권의 회복에 노력했다. 한국 전쟁에서는, 기지까지의 거리가 짧았고 F-86 세이버등의 강력한 호위 전투기가 있는데다, B-29의 강력한 방어 포화 등에 의해 격추된 기체가 24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F-86 세이버를 호위 전투기로서 작전에 투입해도 피해가 발생해, 1951년에는 주간 폭격 임무에서는 제외되게 되었다.[From : wikipedia.org]

 

북한의 노금석 소위가 몰고 투항한 미그-15(고유번호:2015357) 전투기[출처 : 위키백과]

 

 

북한 "미그-15" 조종사 노금석의 투항
1953년 9월 21일 투항한 조선인민군 공군 소속 조종사가 몰고 온 미그-15 한 대가 김포 비행장에 착륙합니다. 미그-15를 몰고 온 노금석 소위는 이후 포상금 1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거주하였으며 후일 미국 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그-15(고유번호:2015357)는 그 당시로서는 적국의 최첨단 전투기 였으니 지금도 미국 공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그 가치가 당시엔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전냉전기간 동안 미그-15는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배치되었으며 간혹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전투기와 교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freercplans.com]

 

 

중동전쟁

이집트는 소련의 승인 아래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MiG-15bis와 MiG-17을 구입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운영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발발한 제2차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 공군은 미그-15를 운용하여 영국산 제트 전투기인 글로스터 미티어를 격추하기도 합니다.[자료출처 : 위키백과]

 

 

 

미그-15 제원

승무원   MiG-15 1명, Mig-15UTC 2명
길이  10.11 m
날개폭  10.08 m
높이  3.70 m
날개 면적  20.6 m²
날개 형태  후퇴익
엔진 정보  1× 클리모프 VK-1 터보제트, 26.5 kN

 


중량
비적재시  3,580 kg
적재시  4,960 kg
최대 이륙  6,105 kg


성능
최고 속력  1,075 km/h
날개 하중  240.8 kg/m²
추력 대 질량  0.54


무장
기관총  NR-23 2정, N-37 1정
폭탄  100kg 급 폭탄 2발

 

 

[동영상 출처 : trufault· 님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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